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국내 PC 게임 시장은 콘솔 게임 시장과 다르게 활성화되어 있었고. 미국에서 발매한 게임을 영문판 그대로 수입해 박스 패키지와 매뉴얼 정도만 한글화하는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매우 다양한 게임이 발매됐었다.
앞서 1부에서 언급한 세계 3대 RPG인 울티마, 위저드리, 마이트 앤 매직이 PC 게임인 만큼. 서양식 RPG 게임의 본진이 PC 쪽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JRPG는 보기 드문 장르였다.
일본 PC 시장에서도 JRPG는 활발하게 나왔지만 그게 일본 NEC에서 발매한 NEC PC-8801, 9801용으로 나온 게임들이라서 당시 한국에 보급된 IBM-PC에 호환되지 않지 않아 컨버팅이 필요해서서 그런 것도 있다.


1987년에 일본 팔콤에서 만든 JRPG 게임 ‘이스(イース)’를 미국의 KYODAI에서 IBM-PC로 컨버팅한 버전이 1989년에 나왔고, 이게 한국 컴퓨터 잡지에 소개된 바 있다. (KYODAI는 일본 게임 및 소프트웨어를 IBM-PC용으로 컨버팅 작업을 하는 투자 합작 회사로 페르시아의 왕자로 유명한 브로드번드도 참여한 곳이다)
시기적으로 볼 때, IBM-PC판 이스는 한국 PC 게임 시장에 처음 소개된 JRPG였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히트를 치지는 못했고. 아는 사람만 즐기는 매니악한 게임이 됐다.
초등학교 시절에 보던 게임 잡지에서 하도 이스, 이스 거려서 이스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IBM-PC용 이스를 구해서 실행시키고 나선 이게 대체 뭐냐고 고개를 기울이며 제대로 플레이를 해보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게임 잡지에 실린 MSX판 이스와 비교해 보면 같은 게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비주얼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나는 점이 많아서 그랬었다.


사실 내 초등학교 시절에 한국의 PC 게임 시장에서 히트 다운 히트를 친 JRPG 게임은 게임 아츠에서 1987년에 만든 ’젤리아드(ゼリアード)‘였다.
PC-8801용으로 나온 원작 게임을, 어드벤처 게임의 명가인 ’시에라 온라인(지금 현재의 시에라 엔터테인먼트)‘에서 판권을 사서 영문화시켜 IBM-PC 버전으로 컨버팅한 걸 한국에서 역수입한 것이다.
당시 매주 토요일에 개방되어 무료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컴퓨터 학원에서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초인기 게임 중 하나였다.
이스와 다르게 정식으로 발매된 작품이고.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지만…, 박스 패키지에 적힌 게임 장르가 ’액션 어드벤처‘로 소개되어 있을 정도로, JRPG 게임인데 JRPG 게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액션성이 강한 게임이라 엄밀히 말하자면 정통 JRPG보다 액션 RPG에 가까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초등학교 시절 이 게임을 했을 때는 액션 게임이라고만 생각했지 RPG 게임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었다.
초등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올라간 이후, 1990년 초에서 중순 사이에는 국내에서 자체 개발한 국산 게임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했고, 이때 나온 국산 RPG 게임은 JRPG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신검의 전설‘ 같이 1980년대에 나온 국산 RPG 게임은 ’울티마‘ 같은 서양식 RPG 게임의 영향을 받은 반면,


1993년에 에이 플러스에서 만든 ’홍길동전‘ 같은 게임은 고전 소설 ’홍길동전‘을 원작으로 삼고 있어 한국적인 내용과 색채를 가지고 있지만, 게임 스타일 자체는 JRPG의 표준을 제시했던 드래곤 퀘스트를 따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PC 게임 시장에 JRPG 스타일을 유행시킨 게임은 따로 있었으니,


1994년에 손노리에서 만든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였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홍길동전처럼 어떤 특정한 JRPG 게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보다는, JRPG 스타일을 도입하면서 자기만의 스타일로 재구성해 한국 RPG 게임의 기틀을 마련하면서 한국 게임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이다.
서양식 RPG 게임은 플레이어가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게임에 참여하고 자유도를 중시하며, 게임 내에 등장하는 인물보다 달성해야 할 임무(목표)에 초점을 맞췄는데. JRPG 게임은 반대로 캐릭터가 딱 정해져 있고. 게임 내에서 달성해야 할 임무보다 캐릭터 서사에 집중해서 그게 스토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내용이 되어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어서 스타일이 전혀 달랐다.
그 때문에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게임의 내용을 알지 못하면, 게임의 재미를 100%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는 JRPG 스타일을 베이스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메인 스토리 임무 수행의 전후 과정보다 캐릭터 서사에 집중해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전개했고. 국산 게임이라 한글로 나오니 어떤 내용인지 바로 알 수 있어 JRPG 스타일의 매력을 알려 주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의 대성공 이후로 JRPG 스타일의 게임이 주목을 받으면서, 아예 진짜로 일본 현지 PC 게임 시장에서 발매한 JRPG 게임들이 수입되어 정식으로 발매되기 시작했다.
한국 콘솔 게임 시장은 콘솔 자체와 게임 소프트의 가격이 높아서 보급률이 떨어진 것에 비해, 한국 PC 게임 시장은 그와 정반대로 컴퓨터 자체의 보급률은 비교적 높은 편에 속했다.
게임기는 게임밖에 할 수 없지만, 컴퓨터는 게임 이외에 다른 것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만 즐기는 놀이 기구가 아니라, 가정에서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가전제품의 하나란 인식을 갖고 있어서 그랬다.
보급이 잘되어 있으니 용산 프리미엄으로 후려쳐질 일이 없었고, 80년대부터 게임 정식 발매가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말 많고 다양한 게임이 들어왔으며 JRPG 게임도 드디어 그 기류에 편승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본 팔콤의 ‘드래곤 슬레이어 영웅전설(ドラゴンスレイヤー 英雄伝説)’은 JRPG 게임의 교과서라고 봐도 무방할 만큼 기본에 충실한 정통 JRPG 게임이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가 JRPG 스타일의 매력을 알려주었다면, 드래곤 슬레이어 영웅전설은 원조 JRPG의 참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페가서스 저팬의 ‘그레이스톤 사가(グレイストンサーガ)’, TGL의 ‘파랜드 스토리’, 그로디아의 ‘라그나레크(ラグナレック)’, ANJIN의 ‘메타녀(メタ女)’ 등등. 재미있는 JRPG 게임들이 속속들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사실 해당 작품들은 장르적으로 SRPG 게임이긴 하지만, 캐릭터의 서사에 집중하고 있어서 JRPG의 문법에서 어긋나지 않았기에 그 매력이 어디 다른 곳에 가지 않았다


코에이의 ‘삼국지 영걸전(三國志 英傑伝)’은 국내 게임 잡지에서 관련 정보가 실렸을 때부터 엄청 기대했고. 발매한 이후 플레이하게 됐을 때 기대한 만큼 만족스러운 재미를 느꼈었다.
삼국지 소재의 JRPG 게임으로, 콘솔 쪽에는 캡콤의 ‘천지를 먹다’ 시리즈가 있다면 PC 쪽에는 영걸전 시리즈가 있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마란스(アマランス)’ 시리즈는 후가 시스템의 대표 JRPG 게임인데, 번역이 좀 엉망이라서 게임의 재미를 100% 즐기기 좀 어려움에 따랐던 기억이 난다.
90년대 당시 한국의 PC 게임 시장에는 대만 게임도 많이 수입됐고, 그 과정에서 본래 일본에서 나온 JRPG 게임을, 대만에 수출해 중국어판으로 컨버팅한 걸, 한국에서 역수입해서 일본어를 중국으로 번역한 걸 한국으로 재번역하는 황당한 일도 자주 생겼는데, 후가 시스템의 게임들이 그런 케이스에 속했다.
JRPG 게임이 정식으로 수입되어 한글판으로 즐길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지만, 번역 퀼리티의 어떤 건 괜찮고, 어떤 건 나빠서 극단적으로 나뉜 것은 문제라고 할 만한 부분이었다.
번역 퀼리티 이외에 또 다른 문제는 시리즈를 잘라먹는 발매다.
위에서 말한 아마란스 시리즈만 해도, 당시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온 건 ‘아마란스 3’, ‘아마란스 4’, ‘아마란스 KH’, ‘아마란스 3D’ 등 세 작품이었는데. 여기서 아마란스 3D는 실은 ‘아마란스 1’의 리메이크판이라서 ‘아마란스 2’만 유일하게 국내에서 구경도 못 해봤다.
그래도 아마란스 시리즈는 스토리가 하나로 쭉 이어지는 게 아니고. 캐릭터는 같아도 내용은 다른, 독립적인 스토리로 진행이 되다 보니 시리즈 짝이 맞지 않아도 게임 플레이상의 문제는 없었는데 정반대의 케이스도 있었다.


마이크로 캐빈의 ‘사크(サーク)’ 시리즈는 MSX2용으로 1탄, 2탄이 나오고 PC-9801용으로 3탄이 나왔는데. 전체 시리즈가 하나로 연결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고. 3탄이 최종편이라서 1탄, 2탄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이 많이 나왔다.
스토리가 전작과 이어지는 것도 이어지는 거지만, 작중 주요 인물이 구면이라서 자기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쑥덕거리는 상황이라 그랬다.
하지만 시리즈 최종편답게 작중에 던져진 떡밥을 모두 회수하고, 캐릭터의 서사도 완전히 끝을 봐서, 메인 스토리가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고 봐도 될 만큼 깔끔하게 잘 끝난 관계로 시리즈를 처음 접한 사람한테 불친절하다고는 해도, 시나리오 자체의 완성도 자체는 높은 축에 속하며. 폭풍 간지나는 대사와 연출, 드라마틱한 전개가 일품이라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작품이었다.
간혹, 시리즈 짝수가 맞지 않게 발매된 JRPG 게임 중에서도. 시리즈물이란 인식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이 한 작품만으로도 엄청난 재미를 주는 특이한 경우도 있었다.


그게 바로 KSK(Kure Software Koubou)의 ‘퍼스트 퀸 4(ファーストクイーン4)’다. 퍼스트 퀸 1탄, 2탄이야 PC-8801용으로 나왔기 때문에 발매 기종이 다르니 스킵한다고 쳐도,


퍼스트 퀸 3(ファーストクイーン3)는 PC-9801용으로 나온 데다가, 스토리가 이어지고 세계관과 캐릭터도 일부 공유하고 있어서 충분히 정식 발매를 했을 법도 한데 그것도 거른 채 4탄만 덜컥 나와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유니트를 모아 부대로 편성하여 실시간으로 전투를 하며 빠르게 진행하는 게임 플레이가 독보적인 재미를 줬기 때문에, 시리즈 짝이 안 맞는 문제를 극복했다.
90년대 한국 PC 게임 시장에 들어온 JRPG 게임 중에 게임 플레이의 재미를 놓고 보면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스토리의 재미를 우선순위로 보면 최고로 손에 꼽을 게임은 또 따로 있었다.


일본 팔콤의 ‘영웅전설 III ~하얀 마녀~(英雄伝説Ⅲ 「白き魔女」)다.
어린 소년 소녀의 순례 여행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숨겨진 비밀이 밝혀지면서 감동적인 스토리로 플레이어의 눈물 콧물을 쏙 빼서 JRPG 특유의 캐릭터 서사 중심 스토리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었다.
게임 플레이의 재미는 퍼스트퀸 4, 게임 스토리의 재미는 영웅전설 III ~하얀 마녀~로 나누어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명작 JRPG 게임을 컴퓨터로 플레이할 수 있다는 건 축복과 같았다.
내 10대 시절에는 비록 비디오 게임기 한 대 장만하지 못해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일본발 JRPG의 황금기를 누리지 못했지만, 한국 PC 게임 시장에 찾아온, 한국발 JRPG의 르네상스 시대 전반부를 겪었기에 충분히 보상을 받았다.
여기서 포인트는 ’전반부‘라는 건데. 솔직히 말하자면 ’후반부‘는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그게 컴퓨터를 중학교 시절에 구입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가 90년대 후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도스 시대에서 윈도우 시대로 완전히 넘어갔고, 새로 나오는 게임이 윈도우 전용 게임으로서 최소한의 컴퓨터 사양을 요구했기 때문에 그렇다.
즉, 옛날에 구입한 컴퓨터로는 DOS 게임은 가볍게 실행할 수 있었지만, 윈도우 게임을 구동할 때는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할 정도로 버벅거려서 게임 플레이는 고사하고. 게임을 실행하는 시늉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TGL의 ’파랜드 택틱스(ファーランドサーガ)‘, KSS의 ’용기전승(竜機伝承)‘ 등등. 윈도우 시대의 PC 게임 시장에는 재미있는 JRPG 게임이 나왔고, IBM-PC판 이스로부터 거의 10여 년이 지난 뒤에 나온 ’이스 이터널(イース エターナル)‘을 정식 한글판으로 영접하게 됐는데…, 컴퓨터 환경상 무엇 하나 제대로 실행을 해보지 못했다.


게임 자체는 90년대 후반, PC 게임 잡지의 게임 CD 부록 증정 전쟁 시대에 돌입해서, PC 게임 잡지만 사면 게임 CD가 바로 딸려와서, PC 게임 시장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게임 패키지 시장의 몰락을 불러일으켰지만. 게이머 입장에서는 잡지 한 권 살 돈으로 인기 게임을 사는 것이라 도스 시절보다 더 게임 공급이 수월해졌으나, 컴퓨터 사양 문제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PC 게임 잡지를 습관적으로 사서 모으면서 게임 CD를 차곡차곡 쌓아도, 정작 내 컴퓨터로 구동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니. JRPG에 대한 관심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그래서 90년대 후반부에 가서는, 컴퓨터 사양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PC 통신 쪽에 관심을 갖게 됐다.
각종 동호회와 소모임에 들어가 사람들을 사귀고, 게시판에 연재되는 소설을 읽다가 나도 직접 소설을 써서 연재를 하면서 새로운 재미에 맛이 들였다.
컴퓨터 모뎀에 전화선을 연결해야 했기 때문에 한밤중에 몰래 마루에 컴퓨터랑 모니터를 옮겨다가 전화선을 꽂아 몰래 PC 통신을 하고, 야간 정액제를 이용했는데 이용 한도가 초과한 것도 모르고 신나게 통신을 하다가, 다음 달 전화비 폭탄이 터져 부모님께 엄청 혼났던 기억도 난다.
21세기 미래에는 어떨는지 몰라도. 적어도 20세기의 내 게임 라이프에서 JRPG는 도스 시절에 머물러 윈도우 시대로 넘어가지 못한 채, 그렇게 끝나는 듯싶었다.

그런데 1999년 12월.
21세기를 한 달 앞둔, 20세기의 마지막 달.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 예언이 빗나가 세계가 새천년 밀레니엄 시대를 코앞에 두고 있던 그때.
그것.
아니, 그 게임이 내게 찾아왔다.
20세기의 마지막 밤하늘에 빛나는 JRPG의 별이, 한줄기 유성우가 되어 내게 쏟아져 내려온 것이다.
- 3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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