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3년에 러시아, 영국 합작으로 ‘마리아노 바이노’ 감독이 만든 호러 영화.
내용은 영국인 ‘엘리자베스’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외딴 섬의 수녀원에 큰돈을 기부해서 그걸 수상하게 여겨, 왜 그런 건지 본인이 직접 밝혀내기 위해 홀홀단신으로 수녀원에 찾아갔는데. 그곳이 실은 밤마다 수녀들이 기묘한 의식을 하고 고대의 악마가 봉인된 곳이라서 거기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는 이야기다.
타이틀 ‘다크 워터스’가 의미하는 건 문자 그대로 검은 물인데. 섬마을을 무대로 삼아 주요 사건이 벌어질 때 폭우가 내려서 그런 것 같다.
수녀들이 수상한 의식을 벌이고, 진실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살해하는데. 실은 수녀들이 고대의 악마를 봉인하고 있었고. 수녀원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찾아온 여주인공은 그 악마의 자식이라서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혈연에 의한 운명처럼 악마의 봉인을 풀기 위해 온 것이란 메인 스토리가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 느낌이 난다.
정확히는, ‘인스머스의 그림자’의 변주곡이라고나 할까.
근데 사실 인스머스의 그림자는 데이곤을 추종하는 딥 원(심해인)들이 나오는데. 본작에선 반대로 기괴한 의식을 하는 수녀들이 고대의 악마를 봉인하는 역할을 한다.
밤마다 불붙인 십자가를 들고 다니며 수상한 의식을 하고. 봉인과 봉인의 지식에 접근하는 사람들을 급습해 단검 들고 덤벼들어 푹푹 찔러 대는 수녀들이 풍기는 불온한 분위기가 본작의 주요 공포 포인트다.
‘수녀들이 악당들인 줄 알았는데 실은 주인공이 악당의 가계였다!’인 것이 주요 포인트라서 인스머스의 그림자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작품과 다른 확실한 차이점이 있다.
작중에 나오는 고대의 악마는 그 얼굴을 본떠서 만든 ‘탈리스만’이 봉인 아이템으로 나오는데. 탈리스만에 새겨진 모습 그대로의 얼굴로 나오며, 인간과 동떨어진 인외의 형상을 가진 악마 중엔 드물게 여성형 악마로 나온다.
주요 인물이 전원 여성으로 나오고. 남자는 배경 인물 정도로만 나오는 것도 눈에 띤다.
미장센적인 부분에서는 악마가 봉인된 감옥과 의식이 벌어지는 지하 동굴이 기억에 남는데. 동굴 안에 촛불을 항상 켜두어서 주변이 밝지만 대형 십자가의 예수가 동굴 안쪽에 안치되어 있고, 그 위로 빗물이 계속 떨어지며 스산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과 눈 먼 장님 수도사가 사람의 피로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설정 등이 인상적이다.
고어한 장면과 괴물 디자인은 ‘루치오 풀치’ 느낌인데 미장센의 시각적인 감각은 ‘다리오 아르젠토’ 느낌이 나서, 작품 자체는 영국 영화인데 실제 느낌은 이탈리아 영화에 더 가깝다.
그게 본작을 만든 ‘마리아노 바이노’ 감독이 본래 이탈리아 출신으로 미국 정부로부터 영화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아 미국으로 귀화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다.
아쉬운 점에 있다면, 극 전개상 필요한 설명을 죄다 스킵하고 넘어가면서. 주요 인물과 스토리상의 반전을 짜임새 있게 만든 게 아니라 뜬금없이 툭 튀어나온 수준으로 끼워 맞춰서 디테일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스토리가 진행되면서 사건의 진상이 자연스럽게 밝혀지는 게 아니라, 극 후반부까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혼돈의 카오스가 쭉 이어지다가, 영화 끝나기 전에 한 번에 몰아서 설명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엔딩도 엘리자베스가 제 손으로 악마의 봉인을 풀더니 대뜸 탈리스만을 내던져 깨어 버리고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눈이 하얗게 뒤집힌 눈먼 수녀가 되어 탈리스만 조각을 목에 걸고, 뜬금없이 ‘눈먼 사람들은 짐승의 참모습을 보고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라고 나레이션이 흘러 나오며 끝이 나서 좀 이해가 안 간다.
최대한 해석해 보자면, 짐승의 참모습이란 건 작중에 나오는 고대의 악마고. 나레이션이 흘러나와 그걸 설명하는 것과 눈이 먼 주인공이 엔딩을 장식하는 것 등은 내용과 별개로 연출적으로 루치오 풀치 감독의 지옥문 3부작 중 하나인 ‘비욘드(1981)’의 오마쥬가 아닐까 싶다.
비욘드에서는 마지막에 남녀 주인공이 호텔 지하에서 이어진 황량한 지옥을 헤매면서 빛을 향해 걸어가지만, 어느 순간 두 눈이 멀고, ‘너희는 암흑의 바다에서 영원히 헤매게 되리라’라는 나레이션이 흘러나와 절망의 마침표를 찍는다.
결론은 추천작. 본편 스토리와 스토리를 풀어가는 과정, 엔딩 등 스토리 전반에 필요한 설명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가 막판에 몰아서 해서 스토리의 디테일이 좀 떨어지는 경향이 있지만, 미장센이 좋고 불온한 분위기를 잘 묘사해서 시각적인 부분에서 극의 긴장감을 끌어냈고, 러브 크래프트풍의 이야기를 이탈리아 호러 영화 스타일로 풀어낸 게 독특한 맛이 있어서 한 번쯤 볼만한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꽤 파란만장하다. 1991년에 소련(구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 붕괴 이후 독립국가가 된 우크라이나에서 촬영된 첫 번째 서양 영화로, 우크라이나의 크리미아, 키예프, 오뎃사.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촬영을 했는데.. 영국 현지에서는 구할 수 없는 고품질 배경 세트장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받았지만, 당시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상황 때문에 쿠데타가 수차례 발생했고. 이 작품의 촬영 당시에도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거기에 휘말릴까 봐 불안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덧붙여 이 작품은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순차적으로 러시아, 이탈리아, 포루트갈, 캐나다, 일본에서 개봉했고, 미국 개봉은 상대적으로 늦은 2006년에 했는데, H.P 러브크래프트 필름 페스티벌에 출품된 것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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