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얼음 (Fire and Ice.1983) 2019년 애니메이션




1983년에 ‘랄프 박시’ 감독이 만든 판타지 애니메이션. 제목만 보면 ‘조지 R.R 마틴’의 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가 생각날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관계가 없는 작품이다.

내용은 얼음으로 뒤덮인 북쪽의 ‘아이스픽’ 요새에서 사악한 여왕 ‘줄리아나’가 아들인 ‘네크론’ 왕자가 빙하를 조종하는 마법과 서브 휴먼을 동원해 현 인류를 몰아내면서 지배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고. 용암이 들끓은 화산 지대에 있는 남쪽의 ‘파이어킵’ 성채의 왕 ‘야롤’이 그에 맞서 대립을 하던 중에, 줄리아나의 계략에 의해 야롤 왕의 딸 ‘티그라’ 공주가 납치되어 인질 겸 정략결혼을 통해 아이스픽이 파이어킵에 협정을 가장한 투항 권고를 하게 됐는데.. 티그라 공주가 잡혀가던 길에 네크론의 빙하로 파가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란’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용맹한 전사 ‘다크 울프’가 두 사람을 도우면서 아이스픽과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본작은 판타지물로 장르를 분류하면 ‘소드 앤 소서리’라고 할 수 있지만, 이게 중세 판타지보다는 원시 시대와 고대 시대 사이에서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수준이라서 ‘비스트 마스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바바리안 판타지물에 가깝다.

작중에 현 인류는 인간으로 완전 진화된 모습 그대로 나오는데. 이에 대치점을 이루는 ‘서브휴먼’은 진화가 약간 덜 된 녹색 피부의 원시인의 모습으로 나온다. 호모 사피엔스 VS 네안네르탈레인의 대결 구도 같다고나 할까. (근데 정작 그들을 지배하는 줄리아나 여왕과 네크론 왕자는 생긴 게 또 멀쩡하고 복색은 아예 중세 판타지 느낌 난다)

아이스픽 VS 파이어킵, 서브휴먼 VS 휴먼 등의 진영, 종족 구도가 제대로 잡혀 있긴 한데, 정작 본편 스토리 내에서는 양 진영/종족의 충돌을 밀도 있게 그린 게 아니라, 단순히 히로인 구출 작전에 올인하고 있어서 모처럼의 배경 설정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히로인인 ‘티그라’ 공주가 납치되면서 본편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티그라 공주가 인질로 잡혀 있어서 파이어킵은 아이스픽과 전면전을 치를 생각도 못한 채 협정을 가장한 항복 권고를 받아들이러 가고, 주인공인 ‘란’의 목표도 네크론을 물리치고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것 같은 게 아니라. 티그라 공주를 무사히 구출하는 것으로 나올 정도다.

하위 인류도 단순히 적 졸개들로만 나올 뿐. 현 인류와 제대로 된 싸움 한번 하지 않는데. 이게 네크론 왕자의 빙하 조정 마법이 워낙 강력해서 재난 레벨이기 때문에 전쟁 씬이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상황이다.

란도 명색이 바바리안 판타지의 남자 주인공인데 근육 몸에 가죽 빤스 한 장 걸치고 나오지만 싸움을 기차게 잘하는 것도, 힘이 굉장히 센 것도, 마법의 무기를 소지한 것도, 예언의 용사인 것도 아니다.

그냥 작중 끝판 왕의 재난 마법에 전멸 당한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란 설정이 끝이다.

거기까지 보면 배경 설정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해 본편 스토리가 되게 밋밋하고 재미없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다르다.

일단, 티그라 공주가 겉만 보면 바바리안 판타지의 헐벗은 히로인으로 나와서 서비스 씬만 보여주는 것 같아도 무력하게 잡혀가는 것만은 또 아니고. 기회가 될 때마다 탈출을 시도하고. 다시 붙잡혀 와도 또 탈출하고. 의식이 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다.

붙잡히고 탈출하고, 다시 붙잡히는 게 반복되는 전개가 좀 단조로울수도 있으나, 붙잡힌 채 구출되길 바라며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더 극에 활력을 불어 넣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란 같은 경우, 주인공으로서의 무력이 출중한 건 아니지만. 주인공 보정을 받아서 운이 좋고 생존 능력이 탁월해서 위기를 돌파하며, 티그라 공주를 구하기 위해 분전한다.

티그라 공주는 또 티그라 공주대로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해서 이게 또 남녀 주인공의 케미를 이루어 스토리의 몰입도를 높여준다.

근데 또 여주인공 구출 작전 위주의 스토리라서 바바리안 판타지로서의 액션이 뒤떨어지는 건 아니다.

본작의 액션을 담당하는 캐릭터는 ‘다크울프’라고 해서 늑대 가죽을 뒤집어 쓴 야만용사인데. 란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 때 나타나 도와주고. 이후, 란이 티그라 공주를 구하러 간 동안. 혼자서 서브휴먼들을 도살하면서 일인무쌍을 찍고. 심지어 본작의 끝판왕인 네크론 왕자와 일 대 일 대결을 벌여 물리치기 때문에, 조력자 포지션이라 출현 분량은 란보다 한참 적지만, 캐릭터 개인의 존재감과 활약상은 진 주인공급이다.

네크론 왕자는 빙하 마법과 염력 등 작중 최강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세계 정복의 야망에 꿈꾸는 어머니와 다르게 본인은 평화를 경멸하는 광기에 찬 캐릭터로서 순수 악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비주얼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그 당시 판타지 관련 일러스트로 유명한 ‘프랭크 프레젯타’가 공동 프로듀서로 작업에 참여했고 ‘랄프 박시’ 감독과 함께 만든 캐릭터를 기본 베이스로 해서 ‘로토스코핑’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만들었다.

로토스코핑은 실사 이미지의 외형선을 한 프레임씩 베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원본 이미지와 합성하는 기법이라서 실사 이미지+애니메이션의 합성이라서 작중에 나오는 캐릭터의 움직임이 사실적으로 만화적 과장이 거의 없다.

작중 캐릭터들이 달리고 뛰고 타고 오르는 것 등을 쭉 보다 보면 브로드번드의 카라데카(1984), 페르시아의 왕자(1989) 같은 게임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해당 게임들도 로토스코핑기법으로 만들었다.

달리는 장면이 유난히 많고 또 길게 나오는데 이건 랄프 박시 감독의 이전 작인 ‘반지의 제왕(1977)’ 애니메이션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특성으로 사실적인 움직임을 부각시키기 위해 넣은 듯싶다.

랄프 박시 감독과 함께 캐릭터를 만든 게 코난 시리즈의 일러스트를 맡아 그려 코난의 비주얼을 확립한 ‘프랭크 프레제타’인 만큼. 전반적인 캐릭터 디자인과 배경이 바바리안 판타지에 최적화되어 있다.

물론 프랑캐 프레제타가 직접 그린 포스터와 본작의 작풍은 일러스트와 애니메이션의 차이가 있어 갭이 좀 있는 편이지만, 그래도 일본 AV 표지 사기 수준까지는 아니다.

그밖에 비주얼의 연출적인 부분에서 네크론 왕자가 빙하를 조종해 재난을 일으켜 마을을 뒤덮는 씬, 파이어킵에서 용암을 분출시켜 빙하를 녹이는 씬, 드래곤 호크(익룡 라이더) 부대의 동굴 요새 잡입 씬 등등. 캐릭터 이외의 부분에서도 인상적인 장면이 꽤 나온다.

결론은 추천작. 진영/종족 간의 대립과 싸움이 주요 배경 설정으로 나오지만 본편 스토리는 남자 주인공이 히로인을 구하러 가는 이야기라서 좀 소재 활용을 못한 느낌이 들긴 하나, 주인공의 히로인 구출 여정이 스토리의 몰입도가 꽤 높고. 주인공의 조력자인 다크울프의 카리스마와 대활약이 본작의 액션을 책임지면서 바바리안 판타지로서의 볼거리를 제공해서 재미있는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이온 플럭스(1991)’, ‘알렉산더 전기(1997)’로 잘 알려진 한국계 미국인 애니메이션 감독인 ‘피터 정(한국명: 정근식)’이 본작의 레이 아웃 아티스트로 참여했다. 피터 정의 애니메이터 필모그래피로는 본작이 데뷔작에 해당한다.

덧붙여 본작은 2010년에 실사 리메이크 프로젝트가 발표됐는데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메가폰을 잡기로 했고, 2014년에는 소니 픽쳐스 엔터테인먼트에서 로버트 로드리게스가 만들 실사 리메이크판의 판권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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