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18]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 2020년 게임(카테고리 미정리)





동인 팀으로 시작해 '월희'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타입문이 독립 회사를 차린 다음 첫 선을 보인 작품. 보통 이런 케이스는 첫 작품에서 삐꺼덕거리다가 나중에 대박을 하나 터트려 성공을 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그런 선례를 완전히 깨버린다.

개인적으로 타입문의 월희를 처음 해보았을 때, 스토리가 좋다는데 이견은 없지만 작화를 비롯해 전체적인 게임 틀이 동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게임 자체를 놓고 봤을 때는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게임은 소설과 다르기에 시나리오, 즉 텍스트만으로는 절대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 게임 개발자는 오만방자하게 굴며 게임 개발자가 게임을 만드는데 있어 전부 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본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실제로 명작 게임이 되기 위해서는 개발자 뿐만이 아니라 시나리오, 연출, 편집, 음악, 프로그램 등 모든 스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작품은 팀웍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시나리오 자체의 퀄리티도 극강하지만 월희랑 비교해 볼 때 그야말로 환골탈태했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작화 수준과 미려한 음악, 그리고 멋진 연출 등등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

보통 비쥬얼 노벨하면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미리 정해진 선택문에 따라 전개가 되기 때문에 자유도의 부재가 꼭 생기는데 이 작품은 그러한 문제점을 방대한 양의 스토리로 커버했다. 제작사 측이 밝힌 정독 플레이 타임 60시간이란 게 허언이 아니다.

방대한 양의 스토리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인 단순한 패턴과 고정된 이야기 구조. 지루함 등은 절대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60시간은 총 3가지 루트로 전개가 되는데.. 이 3가지 루트는 분명 등장 인물이 같고 사건, 사고, 상황을 공유하고 있지만 스토리 진행은 완전히 다르다.

3가지 루트는, 3가지 이상을 대변한다. 정의의 아군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하려는 현재의 주인공. 정의의 아군이 된 미래의 주인공. 누구 한 사람의 아군이 되어 많은 사람의 희생 시킨 주인공.

어떤 비쥬얼 노벨이든 주인공의 이상은 헛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문제점을 완벽하게 보완했다.

3가지 루트는, 3가지 이상을 대변한다. 정의의 아군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하려는 현재의 주인공. 정의의 아군이 된 미래의 주인공. 누구 한 사람의 아군이 되어 많은 사람의 희생 시킨 주인공.

즉 서로 연관성을 가진 세 가지 이상에 따라, 각 루트에서 주역이 되는 인물이 다르고 주인공의 이상과 성장 과정도 변하기 때문에 한번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게 된다.

등장 인물의 사상을 선과 악이란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로 구분 짓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은 어째서 선인데 사실 선이 아니다 라고 하거나, 악은 어째서 악인데 사실 악이 아니다 라고 하는 무위사상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선과 악에 대한 고차원적인 성찰은 이미 '아틀라스'의 간판 게임인 '여신전생' 시리즈에서 이미 다 써먹은 거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그게 아니었다.

미소녀물 답게 본질적인 주제인 '사랑'에 근거하여, 모든 사람을 다 구할 수는 없다 라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데.. 각 루트에 따라 등장인물의 활약과 생존 여부가 달라지기 때문에 60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등장 인물이 퇴장을 할 때는 가차가 없다. 그러나, 분명 여운을 남겨준다. 또한 각 엔딩에서는 구원을 받은 이와 구원을 받지 못한 이가 나온다. 하지만 매우 당연하다는 듯이 서로 다른 세 가지 결과에 만족할 수가 있다.

열 명 남짓 되는 조연들 또한 각기 다른 이상과 활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들을 한 루트에 다 끼워 넣어 억지로 활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루트에서는 허무한 죽음을 당하지만, 어떤 루트에서는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거나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는 등 주연급 못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버릴 캐릭터가 거의 없다는 거다. 개인적인 취향과 대중적인 인기는 둘째치고 스토리 구조의 완성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시나리오 작가의 캐릭터 운용 능력은 거의 신기에 가깝다.

타입문의 특성이라고나 할까? 분명 내용은 어둡지만, 등장 인물은 진짜 살아 있는 사람처럼 양면성을 갖추고 있으며 간간히 밝은 모습과 적지 않은 개그를 보여주는 것도 참 좋다. 분위기가 딱딱한 상태에서 계속 진행을 하다 보면 플레이 타임 60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 둘 유저가 분명 있을 테니, 이러한 점은 활력소라고 할 수 있다.

데드 엔딩과 배드 엔딩은 총합 50개 정도가 있는데.. 여기서 어드바이스 시스템으로 본편의 등장 인물이 나와 일명 타이거 도장이라고, 개그와 함께 조언을 해주기 때문에 게임 오버를 당해도 불쾌하지가 않으며 타이거 스템프라는 특전을 주어 그걸 전부 다 모으면 타이거 도장 어드바이스 모음과 엔딩을 돌려 볼 수 있으니 참으로 놀랍다. 여기서 놀랍다는 건 분명 처참하게 죽임을 당해도 타이거 도장 덕분에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유쾌하기까지 해서 타이거 스템프를 다 얻기위해 혈안이 될 수 있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비쥬얼 노벨은 기호 집합 형태의 텍스트. 즉 소설 형식을 바탕으로 진행이 되기 때문에 현란한 액션을 표현하기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 그래서 비쥬얼 노벨이란 장르를 통해 나온 게임의 대부분은 미소녀 게임이나 추리, 혹은 오컬트물이 대부분이다. 헌데 이 작품은 비쥬얼 노벨인데도 불구하고 액션 씬을 박진감 넘치고 표현했다. 이 부분은 시나리오 작가의 역량 뿐만이 아니라 연출의 공이 매우 크다.

비쥬얼 노벨은 화면 보다 텍스트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음악, 효과음, 연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작품은 그 세 가지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비쥬얼 노벨로 액션 씬을 연출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그 방향성을 명확히 제시한 것이다. 동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굳이 움직임 자체에 집착을 할 필요가 없었고, 다만 움직이는 상황이나 혹은 연상이 될만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극대화 시켰다.

가장 큰 예를 들자면 게임 상에 나오는 버서커의 전투 씬을 꼽을 수 있겠다. 광란의 찬 버서커의 포효와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 그리고 번뜩이는 검광이 화면 안을 가득 메우며 텍스트는 신들린 듯 쭉쭉 뻗어 나가 급박한 상황과 주인공의 심리 상태 변화를 보여준다.

주인공이 어떤 싸움을 하든 간에 결코 쉽게 이기는 법이 없이 항상 수세에 몰리다가 극적인 상황에 승리를 거두는 호흡 또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주인공은 힘만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성장을 하기 때문에 지루하지가 않다. (사실 이런 패턴은 월희와 같지만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발전했다)

단점은 지나치게 많은 설정을 스토리 상의 사건 진행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일일히 설명을 하는 것이다.

페이트 루트는 이런 설명이 거의 적었기 때문에 세 편의 시나리오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언리미티드 블레이드 워크 루트는 정말 설명이 장황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세 편의 시나리오 중 가장 화려한 볼거리를 자랑한다. 하지만 마지막 시나리오인 헤븐즈 필에서 모든 게 망가졌다.

이 작품의 기존의 비쥬얼 노벨과 비교할 때 가장 큰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화려한 전투씬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헤븐지 필 루트에서는 전투가 거의 나오지 않고 사전에 완전 차단한 뒤 진짜 설정 설명만 지독하게 늘어 놓는다. 완전 고등학교 주입식 교육이나 다를 바가 없다. 초중반이 팍팍 늘어져 버리니 아무리 극 후반부에 텐션을 올린다고 해도 싱크로하기가 힘들다. 페이트 루트의 시작과 끝을 보고 황금의 이별 편에 이어 에필로그까지 싱크로율 120%를 달성하여 눈물을 펑펑 쏟았던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대부분의 유저가 헤븐즈 필 루트의 사쿠라를 싫어해서 평가가 나쁜 것도 있다. 하지만 난 개인적으로 세간에서 절륜 레즈 머신이라 불리는 토오사카 린 보다는 사쿠라에게 더 호감이 간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가자면 설정의 완성과 이야기의 완전한 종결의 시점으로 볼 때 헤븐지 필은 완성도 높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건 이 작품이 게임이 아니라 소설일 경우로 한정된다고 생각한다.

분명 이 상황에서는 이렇게 전개시킬 수 밖에 없다라는 건 공감을 한다. 허나, 그건 소설의 방식을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것이고.. 게임 시나리오적 측면에서 보면 좀 더 융통성있게 만들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비쥬얼 노벨은 소설 형식의 게임을 표방하는 것일 뿐, 소설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비쥬얼 노벨이란 장르는 소설을 보는 것 같은 게임이 아니라, 내가 어렸을 때 유행했던 게임 북의 발전형이라고 생각한다(지금 생각나는 건 공룡 박물관의 공포 정도?)

월희의 경우, 본편에서 약간 부족한 설정 설명을 가월십야를 통해 풀이했기에 보다 완전한 게임으로 남을 수 있는 반면 이 작품은 그렇지 못해서 좀 아쉽다. 천상 가월십야처럼 확장팩 개념의 게임이 새로 나와야 보다 완벽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책 30권 분량이 넘는 텍스트 양을 자랑하는 지라, 독서에 익숙하지 못한 유저들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그래서 아마도 2004년도 미소녀 게임 랭킹을 정할 때 시나리오 부분과 연출 부분에서는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겠지만 종합 점수에서는 외면을 받기 쉽상이다.

겟츄 사이트가 주관하는 인기 랭킹에서 크로스 채널이 시나리오 부분에서 1위인데 반해 종합 랭킹 1위는 마브러브 라는 걸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뭐 그래도 크로스 채널은 종합 랭킹에서 3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관점에서 본 거고, 유저로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충분히 명작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세이버 루트에 한해서 만큼은 앞으로 내가 늙어 죽을 때까지, 미소녀 게임 중에 비쥬얼 노벨이란 장르로 국한시켜 볼 때 이보다 더 감동적인 엔딩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세이버란 캐릭터 자체는 월희에 나오는 알퀘이드와 완전 닮은 꼴이고 트루 엔딩 연출도 조금 비슷한 지라 시나리오 라이터인 나스 키노코 씨의 취향이나 집필 패턴이 눈에 훤히 보이긴 하지만.. 그 황금의 이별에 이어지는 에필로그만 보면 자꾸 눈물이 난다. 텍스트, 음악, 연출 등의 삼박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결론을 내리자면 누구 하나 튄 게 아니라 전부 다 튄, 진정한 팀웍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 게임을 한 이후 난 더 이상 타입문을 동인 팀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타입문은 훌륭한 독립 회사로 '엘프' '앨리스' '리프' 'F&C'에 버금가는 메이져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유저로서 그들의 활약이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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