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에 ‘강현일’ 감독이 만든 판타지 영화.
내용은 태초에 존재한 첫 번째 남자인 한웅과 첫 번째 여자 마고 사이에 인류가 탄생하고, 한웅이 모습을 감춘 뒤 마고가 12명의 정령으로 나뉘어 자연을 구성하여 인류가 마고성에 정착해 살았는데, 어느날 인류가 붉은 포도를 맛보고 혼란에 빠져 타락한 현대에 이르고, 현세에 환생한 한웅이 마고를 그리워하면서 그녀의 분신체인 정령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걸 지켜보는 이야기다.
본작은 신라 시대 때 ‘박재상’이 쓴 비서 '부도지'에 나온 마고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의 창조신화를 메인 소재로 썼다고 자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좀 다르다.
창조신화를 집중 조명하여 한국의 기원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단순히 현세에 환생한 주인공 한웅이 10살 때부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알 수 없는 여자들의 존재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해 그녀들의 정체가 12정령이고. 타락한 현대 사회에 신음하다 죽어가는 걸 지켜보는 게 주된 내용이다.
작중에 나오는 창조신화 부분은 태초에 존재한 최초의 남자, 여자가 한웅과 마고이고. 그들이 인류의 조상인데, 그게 실은 마고가 한웅의 어머니로, 한웅의 아버지 한인의 아내인데 아들과 근친상간 관계를 맺은 것이라 한인의 저주를 받아 마고성에 살던 인류가 지혜의 과실 붉은 포도를 맛보고 타락한 것으로 나온다.
근데 그게 사실 배경 설정적으로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본편의 핵심적인 내용은 현대 사회의 타락과 정령들의 죽음이다.
물의 정령은 환경오염에 슬퍼하며 폐수에 빠져 죽고, 불의 정령은 전쟁을 비난하며 자기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 분신자살, 비의 정령, 물의 정령은 나이트 죽순이가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탈출 후 나이트클럽 옥상에서 면도칼로 자해하여 동반자살, 나무의 정령은 강간당하고, 대지의 정령은 포크레인에 찍혀 죽고, 달의 정령은 유전자 조작 아기를 낳다가 사산한다.
구름의 정령, 그림자의 정령, 천무(하늘의 정령으로 추정) 정도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해서 총 9명이고 3명이 누락된 것 같은데. 실제로 등장은 했는데 한웅과 천무가 나오기 전에 잠깐 나와서 이름을 알려줄 설명역의 부재로 이름 자체가 언급되지 않은 정령들이 있다.
태초로 거슬러 올라간 과거 회상 때는 정령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나오는데. 현대에서는 보통 사람과 똑같이 옷을 입고 나온다.
단, 너나 할 것 없이 중2병스러운 대사를 줄줄 외면서 혼자 말하고 혼자 리액션하고 혼자 죽으면서 자살쇼를 이어 나가기 때문에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다.
이게 하나의 커다란 스토리가 흘러가는 것도, 옴니버스 방식의 스토리인 것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쓴 것처럼 그냥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마구 진행을 하고 있다. 오직 현대 사회가 타락했다는 것만을 유지한 채로 말이다.
그 현대 사회의 타락을 집중조명한답시고 온갖 무리수를 다 던졌다.
일단, 주인공 한웅이 어렸을 때 50년대로 추정되는 시골 산골 오두막에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데 원자폭탄의 피해자란 설정이 있다. 실제 원폭이 투하된 곳은 일본인데 뜬금없이 한국에 원폭이 떨어져 한웅이 원폭 피해자로 나오며, 어린 주인공에 한정하여 피폭 데미지란 게 단순히 PTSD 증상 밖에 없고 시간 지나니 피폭 피해가 사라졌다는 대사가 나온다.
고기를 얻기 위해 짐승을 도축하는 것도 현대 사회의 타락으로 간주해서 도축자를 악의 축처럼 묘사하는데, 그 비판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동물이 도축되는 장면을 무삭제로 넣고. 유전자 실험 아기를 임신하게 하여 기형아를 낳는다는 뜬금없는 설정을 넣어 의학 실험을 비판하면서 제왕절개 수술 장면을 모자이크 하나 없이 전부 다 넣기도 했다.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 없이 그 부분만 보면 완전 ‘쇼킹 아시아’급이다.
현대까지 살아 있던 정령들이 중2병 대사를 외우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작위적이다. 모든 게 다 불편하고. 모든 것을 다 최악으로 상정한 채 대안 없는 무분별한 비판을 하다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죽은 다음에 대뜸 원령으로 부활하여 도깨비 탈을 쓴 여자들을 모아놓고 인류를 심판하겠다면서 남자들을 잡아다가 죄를 고하게 하고 잔인하게 응징하면서 염라대왕처럼 행동하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창조신화인 줄 알았는데 지옥신화였다)
엔딩은 한웅이 태초 시대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마고가 자신의 어머니였고. 한인의 저주로 인류가 이 모양 이꼴이 됐다는 걸 알고서 자신의 영생과 목숨을 바쳐 한인의 저주를 푸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대체 이 어디가 한국의 창조신화를 다룬 건지 알 수가 없다.
애초에 본편 스토리가 현대 사회를 비판하면서 인류의 심판을 통한 종말을 강조하고 있고, 창조신화 부분은 창조에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인류의 타락 전에는 존나 살기 좋고 자연이 아름다웠는데. 타락하고 나서 다 폭망했다. 이런 식으로 심판의 밑밥을 깔아주는 용도로만 썼기 때문에 신화 판타지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중2병 대사는 좋게 말하면 시적이고, 안 좋게 말하면 듣는 사람이 낯 뜨거울 정도의 민망한 대사들인데 이게 몇몇 캐릭터로 한정된 대사 스타일이 아니라. 작중에 나온 전 캐릭터가 다 그런 대사를 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다.
심지어 주인공 한웅의 10살 아역 시절 배우까지도 시구를 옮기듯 나레이션 대사를 한다.
그냥 대사만 나와도 민망해 죽겠는데 보컬 삽입곡과 BGM을 정말 쉴 틈 없이 계속 틀어주고. 캐릭터 대사, 나레이션 대사가 음악과 함께 계속 들려오기 때문에 진짜 악몽 그 자체다.
음악도 장르의 일관성이 전혀 없다. 한국 전통 음악 스타일에 판소리부터 시작해 테크노 음악에 감성 발라드까지.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음악이 장르까지 수시로 변하니 보통 사람의 이해를 아득히 초월했다.
허나, 본작에서 가장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본작이 개봉 당시 화제가 됐던 남녀 배우의 전라 노출 이슈다.
정확히, 작중에서 타락한 인류를 형상화한 것과 태초의 12 정령이 전부 벌거벗고 나오고. 그 누드 씬을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서 그런 것이다.
성기와 음모까지 완전 노출된 올 누드는 아니고 가슴 정도만 노출되고 중요 부위는 나오지 않고 교모하게 촬영을 하긴 했지만, 다른 건 둘째치고 12 정령의 알몸을 집요하게 찍고 있어서 보는 사람 학을 떼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제 딴에는 ‘신화시대의 정령을 묘사하고 싶었다!’ 이럴 수도 있었을 텐데 현실은 자연을 배경으로 한 알몸 화보집. 즉, 누드집 이상도, 이하도 아닐 정도로 알몸 촬영에 집착해서 예술로 미화할 수도 없다. 퍼포먼스 영화 드립이라도 치고 싶었다면 중2병스러운 대사랑 말도 안 되는 선곡의 음악을 뺐어야 됐다.
홍보 문구에 대학재학 이상. 신장 165cm 이상 신인 연기자들이 펼치는 파격적 누드연기! 라고 써왔는데, 이것도 엄밀히 보면 학력 따지고. 외모 따지는 적폐라서 더욱 예술과 거리가 멀다고 본다.
근본적으로 한국의 창세신화를 다뤘다고 하면서 정작 영화 홍보는 825명의 올누드 충격영상! 제어된 욕망의 무한질주!! 이딴 식으로 누드만 강조하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겠나. (거기다 사실 825명 올 누드도 아니다. 실제 화면상에 비추는 누드로 나오는 사람은 50명 남짓이다)
본편 내용은 현대 사회 비판인데 누드 나온다고 가식과 위선을 벗어던진 충격적 영상 반란 어쩌고 하는 것도 에러다.
메인 설정이나 스토리상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장면도 갑자기 툭 튀어나올 때가 많다.
알몸 남자들이 PC방에서 컴퓨터할 때 노란 옷 입은 귀신같은 모습의 정령들이 나타나서 사이버 전사 드립을 치며 컴퓨터 중독을 까거나, 기둥을 중심으로 알몸 남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듯 기어가는데 기둥 꼭대기에서 테크노 외계인 화장한 귀신같은 모습의 정령이 난자 드립을 치면서 남자들을 정액 취급하는가 하면, 작중에 아예 직접적인 대사로 남자가 득세하면서 인류의 타락이 시작됐다고 하고. 해안가에서 알몸의 사람들이 진흙투성이가 돼서 바둥거리는데 트렌치코트 입은 중년 남자가 지나가면서 왜 그렇게 사냐며 자신이 인류의 죄악을 짊어졌다며 타박을 하는 것 등등. 이상한 내용이 속출해 안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의식의 흐름 기법에 정점을 찍는다.
결론은 추천작. 말로는 한국의 창조신화를 소재로 삼았지만 신화보다는 현대 사회 비판에 초점을 맞추어 기획이 주객전도됐고, 신화 판타지라는 본래 취지의 장르보다 출현진 누드 연기로 홍보해서 예술로 포장할 수 없는데다가, 내용은 난해하고 보이는 건 알몸 밖에 없고. 현대 사회의 모든 게 다 불편한데 그 대안 없는 무분별한 비판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한 너무 극단적인 묘사를 해서 비주얼이 부담스럽기까지 하니 이건 졸작이나 괴작 수준이 아니라. 이 세상의 영화가 아닌 작품이다.
한국 영화사상 가장 이상한 영화 중 하나라서 ‘과연 이상한 영화의 끝은 어디일까?’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면 한번쯤 볼만하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의 홍보 슬로건은 ‘한국영화 사상 두 번 다시 이런 영화는 만날 수 없다!’라고 적혀 있는데. 그 말이 맞긴 하다. 이렇게 이상하게 만든 영화는 한국 영화사에서 전무후무한 일로, 이에 견줄 만한 영화로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정도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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