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선공주(鐵扇公主.1941) 중국/홍콩 애니메이션




1941년에 시네마 에포크에서 만뢰명, 만고섬 형제가 만든 장편 애니메이션. 영제는 프린세스 아이언 팬.

만 형제가 1926년에 제작한 ‘아뜨리에 소동’ 이후로 무려 15년만에 나온 후속 작품으로 역사상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1943년작 ‘거미와 튤립’보다 2년 먼저 나왔다.

1939년에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중국 상하이에서 개봉을 하게 됐는데 그걸 본 만 형제가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결심하고 3년에 걸쳐 237명의 아티스트를 동원해 35만 위안을 들여 만들었다.

내용은 서유기 원작의 59화부터 61화까지 이어지는 파초선 에피소드를 각색한 것으로 손오공 일행이 화염산 앞에 가로 막혀 천축 여행에 차질이 생기자 화염산의 불꽃을 꺼트리기 위해 파초선을 구하러 나섰다가 파초선의 주인인 철선 공주와 그녀의 남편인 우마왕과 대립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원작처럼 3번에 걸쳐 철선 공주, 우마왕과 충돌한 끝에 파초선을 얻어서 화염산의 불을 끄는 내용이 나온다.

기본적으로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해서 캐릭터의 움직임이 사실적으로 다가오지만,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 적지 않게 나와서 지금 관점에서 보면 좀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약간 든다.

사실 사실적인 움직임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만화적 연출을 충분히 활용한 과장된 리액션이다.

저팔계가 길가다 더우니까 자기 귀 한짝을 떼서 부채로 부친다거나, 저팔계가 우마왕한테 슈퍼 마리오 점프로 찍혀서 찌부러 들었을 때 손오공이 귀 잡고 끌어 올려 몸을 펴주는가 하면, 황소 폼 우마왕한테 짓밟혀 종이 인형마냥 납작해진 사오정을 저팔계가 인공호흡으로 숨을 불어넣어 풍선처럼 부풀린 다음 바람을 빼줘 정상화시키는 씬에 손오공이 나무를 활시위로 삼아 저팔계의 상보심금파를 화살처럼 쏴서 그 위에 셋이 함께 타고 날아가는 씬. 그리고 저팔계, 손오공, 우마왕의 변신씬 등등 애니메이션으로서 볼거리가 풍부하다.

변신씬이 특히 기억에 남는데 빛이나 연기에 휩싸여 뿅-하고 변하는 게 아니라, 특정 캐릭터로 변신할 때 그 과정을 그대로 보여줘서 흥미롭게 다가온다.

원작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화염산의 화염 요괴와 철선 공주가 파초선을 처음 부칠 때 일어난 태풍에 의해 언덕 위에 있던 외딴 집에 휩쓸리는데 그 집 안에서 앞가리개 하나 걸친 채 자고 있던 미녀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미녀 복장이 거의 알몸에 에이프런 수준인데 보는 순간 이거 아동용 애니메이션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가자 집이 갑자기 양팔을 꺼내더니 지붕을 잡고 다시 끼는 장면이나 파초선의 바람에 휩쓸린 저팔계가 나무를 잡고 사오정은 저팔계 다리를 잡는데 풍압을 이기지 못해 저팔계 허리가 동강났다가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 붙는 개그씬 등을 보면, 어딘지 모르게 미키 마우스가 주로 나오던 디즈니 단편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안 그래도 저팔계와 사오정은 원전에 충실한 모습으로 나온 반면 손오공은 외형이 미키 마우스 원숭이 버전 같은 느낌을 줘서 더욱 그렇다.

이게 작중 손오공은 유일하게 몸에 털이 난 캐릭터라서 다른 캐릭터와 다르게 전신에서 하관과 손만 하얀색이고 나머지는 다 검은색이라 유난히 그런 것 같다. 게다가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가 풀 컬러 애니메이션 반면 본작은 디즈니 초기의 단편 같은 흑백 애니메이션이라 손오공과 미키가 오버랩되는 것이다.

디즈니 특유의 뮤지컬 요소도 들어가 있어 작품 내에 가사가 있는 노래도 무려 두곡이나 나온다.

가짜 우마왕에게 술상을 차려주고 철선 공주가 그 앞에서 춤을 추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와 가짜 우마왕으로 변신해 철선 공주 통수 치고 파초선을 스틸해서 깔깔 웃으며 저팔계가 자화자찬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제작을 결의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보니 디즈니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것 같다.

작중에 나오는 음악은 나름 괜찮은데 음성 더빙 퀄리티 자체는 전반적으로 볼 때 좋다고 할 수가 없다.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성우 연기가 안 좋다.

특히 사오정은 캐릭터 컨셉이 본래 그런 건지 몰라도 말더듬 캐릭터다. 대사도 몇 마디 없는데 말 자체를 심하게 더듬어서 어쩐지 듣기 부담스러운 점이 있다.

그나마 기억에 남는 건 저팔계가 깔깔 웃는 소리 정도랄까.

스토리에서 원작과 다른 점은 손오공 일행이 철선 공주, 우마왕과 아는 사이지만 홍해아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과거 회상으로도 안 나온다.

우마왕의 인간 폼이 갑옷 입고 투구 쓴 병사의 모습으로 나와 쌍검을 휘두르는 것도 원작에서 흑철곤을 휘두른 것과 다른데 거대한 황솔로 변해서 최종 결전에 임하는 건 같다.

다만, 분량이 길어질 여지가 있는 건 다 쳐내서 우마왕의 첩 옥면 공주가 저팔계에게 맞아 죽는 것이나, 신장의 군대가 개입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본작에선 신장의 군대 대신 마을 사람들이 손오공 일행과 합세해 우마왕과 맞서 싸운다.

마을 사람들로 이뤄진 대규모 군중 씬은 정지된 그림으로 들어가거나, 행군하는 걸 묘사할 때는 검은 그림자 정도로만 그려 넣고 같은 움직임을 반복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더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나름대로 힘이 느껴진다. (아이러니한 게 손오공 일행이 우마왕과 병장기를 부딪치며 싸우는 대결씬보다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하듯 밧줄 당기는 이 부분이 더 파워풀하다)

하이라이트씬이라고 할 수 있는 우마왕 포획 작전 때 거대한 나무를 수직으로 양단시켜 좌우에서 마을 사람들이 밧줄을 메고 활처럼 당겼다가, 손오공의 유인책에 걸려 든 우마왕이 무작정 돌진하다 벌어진 나무 사이에 껴서 갇히고 손오공에게 코뚜레를 당하는데 그 과정에서 황소의 맹렬한 돌진과 함정에 빠져 발버둥치는 걸 리얼하게 묘사한 씬이 강한 인상을 준다.

결론은 추천작. 서유기를 원작으로 삼아서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되 캐릭터, 연출, 묘사 등 작품 전반에 걸쳐 만화적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해 애니메이션에 걸맞게 잘 풀어낸 각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역사상 아시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이라서 그 존재 자체에도 의의가 있기 때문에 꼭 한번쯤 볼 만만 하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74년 전 작품인데 현재 DVD로 복원됐다.

여담이지만 이 작품이 나온 시기인 1940년대는 중국도 일제 강점시 시대였는데 만 형제는 일본군과 아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반일 주제의 선전용 애니메이션을 20개 이상 만들었다고 한다. 이 점은 디즈니가 1940년대에 미국 정부의 의뢰를 받아 반독일 선전 애니메이션을 만든 행보와 비슷한 것 같다.



덧글

  • 먹통XKim 2015/12/25 23:38 # 답글

    일본애니 선구자인 테즈카 오사무도 1943년에 이걸 극장에서 보고 감탄했다더군요.
    그의 작품 나의 손오공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죠.


    이에 일본 혐중 또라이들은 서구라면 모를까 중국 따위 애니에게 일본 애니가 영향받았다는 건 엉터리라능! 발악거리도 했다는 후문도 있죠...

  • 잠뿌리 2016/05/31 17:39 #

    사실 서유기 자체가 중국에서 나온 건데, 그걸 생각하면 데즈카 오사무의 손오공이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굳이 나라 드립치면서 발악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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