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빨간책 (2015) 2020년 웹툰





2015년에 랑또 작가가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해 전 24화로 완결한 호러 만화. 모바일 화면에서 좌우로 이어지는 구성의 컷툰으로 나왔다.

내용은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귀신이나 괴물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와 조우한 순간의 이야기다.

메인 스토리라고 할 게 딱히 없고, 각각의 이야기도 밀도가 대단히 낮아서 독립된 단편이라고 보기도 좀 애매하다.

그도 그럴 게 하나의 이야기를 기승전결에 맞춰 만든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이 귀신과 조우한 순간의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그렇다.

한 편의 이야기로서 성립될 수 있는 모든 걸 다 쳐내고 그냥 공포의 한 순간만을 그린 것이다. 즉, 이야기의 전후 과정을 다 쳐내고 결과만 보여준 거다.

그 때문에 내용 이해를 못하는 독자도 종종 생긴다. 왜 그런지 스피드 웨건이 출동해 설명을 해줘야 이해할 수 있다는 시점에서 다소 즉홍적인 아이디어로 진행되면서 독자에게 좀 불친절한 구석이 있다.

이것은 최소한의 스토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무서운 장면이 생각날 때 즉석에서 정리해 그린 것의 한계다.

근데 사실 이렇게 짧은 내용 안에 무서운 장면 하나에 초점을 맞춘 방식은 이전부터 널리 쓰였다. 정확히는, 요즘의 공포 만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일본 만화로 예로 들면 나카야마 마사아키의 ‘불안의 씨’를 손에 꼽을 수 있다.

불안의 씨도 하나의 에피소드를 단 서너 페이지 안에 짧게 그리면서 전후 과정을 생략하고 인간이 초자연적인 존재와 조우한 순간만 묘사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본작의 구성 방식은 참신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공포물의 새로운 트렌드에 맞춰가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다만, 불안의 씨는 그래도 최소한 공포의 순간에 대한 밀도가 대단히 높아서 한 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여운을 안겨주는 반면.. 본작은 그 반대다.

표현 방식상 스토리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만큼 연출에 신경을 써야 하는데 그 연출에 공을 들이지 않아서 그렇다.

특히 인간과 귀신이 같은 공간에 있는데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많다. 이게 한두 번 그러면 몰라도 계속 반복되니까 굉장히 식상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아무도 없는 집안 혹은 아파트 층계참에 귀신이 출몰한다. 그 뒤 사람이 집안에 들어오면 끝이다.

제 3자인 독자만 알 수 있는 공포의 순간이란 컨셉인 것 같은데 이게 기존 호러 영화에서 즐겨 쓰인 방식으로 집안에서 벌어지는 심령현상을 CCTV로 녹화하면서 벌어지는 공포 이야기인 ‘파라노말 액티비티’를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지만.. 영화는 항상 움직여서 동(動)적이니까 화면에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로도 오싹하게 만들 수 있는 반면 만화는 멈춰 있어서 정(停)적이니까 그런 방식이 역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걸 커버하기 위해 필요한 게 연출이지만 이 작품은 그게 없다. 연출로 승부수를 띄우는 게 아니라, 그림으로 무서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문제는 그게 엄청난 무리수란 점이다. 애초에 이 작품의 작화는 공포물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본작을 그린 랑또 작가는 병맛 개그 만화로 잘 알려진 작가다. 수년간 개그 만화를 그려온 작가가 갑자기 호러 만화를 그런 것이다 보니 공포 만화로서의 밀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개그 만화 그리던 작가가 호러 만화를 그리지 말라는 법은 없고, 오히려 개그/호러 만화 둘 다 잘 그리는 작가는 이전에도 많았다.

일본의 유명 호러 만화가들인 ‘츠노다 지로’, ‘우메오 카즈오’, ‘다이지로 모로호시’, ‘이토 준지’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츠노다 지로는 공포신문으로 유명하지만 데뷔 초기에는 코미디물을 주로 그려서 ‘루미짱의 교실’로 첫 히트를 쳤으며, 이토 준지는 ‘이토준지의 고양이 일기 욘&무’로 공포와 웃음은 종이 한 장 차이란 걸 알려준 바 있다)

허나, 그 작가들의 작품은 호러물을 그릴 때는 개그물도 그렸다는 작가란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호러물에 특화된 작화, 연출, 내용을 선보였기에 본작과 비교할 수는 없다.

결론은 비추천. 개그 만화로 유명한 작가가 해당 장르에 적합하지 않은 작화를 가지고서 공포 만화를 그린 시도 자체는 높이 살 만하지만.. 아이디어가 좋은 것도, 표현 방식이 참신한 것도 아니고, 공포물로서의 스토리와 연출에 대한 고민이나 연구가 일절 없이 그때그때 떠오른 인스턴트식 발상에만 의존해서 공포 장르에 어울리지 않은 작화를 가지고 어거지로 무서움을 안겨 주려고 해서 안이한 작품이다.

여름이 되면 어김없이 튀어 나와서 필름 낭비를 하는 K호러의 웹툰판을 보는 것만 같다.

여담이지만 작가 후기를 보면 작가 본인이 평소 귀신을 잘 본다고 하는데 본편 24화보다 그 후기의 귀신 본 사연을 코믹하게 그린 게 훨씬 볼만했다.



덧글

  • 헤지혹 2015/06/22 15:37 # 답글

    웹툰작가들은 가끔 자신의 능력밖의 것을 시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시도하는 건 좋은데 구상에 대한 노력을 해야죠. 것 외로, 우리나라 공포컨텐츠 치고 사람의 속을 뒤집어놓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겉만 뒤집는데 급급했죠.
  • 잠뿌리 2015/06/23 12:42 #

    비전문분야에 대한 도전을 아무런 고민도, 연구도 없이 '심심한데 이거나 한 번 해볼까?' 라는 느낌으로 입문한 것 같아서 좀 그랬습니다.
  • 역사관심 2015/06/23 02:24 # 답글

    나름 랑또의 팬인지라, 왠일로 공포라고 생각하고 보기시작, 공포의 일상적 찰나를 다룬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이 웹툰 나름 신선하게 봤습니다만 (조석의 '조의 영역'처럼) 채워지지 않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연출'때문이라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그 맥락에서 말씀처럼 후기에 나온 작가의 여담이 더 '연출'면에서 훌륭한 느낌이 들더군요.

    윗분 말씀처럼 '속을 뒤집지 못하고 겉만 뒤집는'느낌은 역시 '그림체'로 무서움을 주려는 (영화로 보자면 '깜놀쇼'에 의지하는) 국내공포툰의 한계라 보이는데, 그 시작점은 아마도 '여고괴담1'의 그 유명한 카메라워크나, 공포웹툰으로 유명했던 '옥수역 귀신'이 아닐까 생각도 합니다. 역시 그림체와 깜놀에 의지하는 작품들인데 큰 반향을 일으켰었으니... 개인적으로는 이런 깜놀쇼보다도 으스스한 분위기의 연출이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웹툰중에서는) 2013 네이버공포툰 시리즈중 '장산범'이었습니다.
    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574303&no=6&weekday=mon


  • 잠뿌리 2015/06/23 12:45 #

    옥수역 귀신이 깜짝 히트친 뒤로 깜놀 장면에 집착하는 한국 웹툰 사이에서 장산범은 그래도 내용 구성에 신경 쓴 작품이라 눈에 띄었지요.
  • 마법시대 2015/06/23 11:36 # 답글

    불안의 씨의 하위호환.
    몇편정도로 끝냈으면 딱 좋았을텐데요.
  • 잠뿌리 2015/06/23 12:46 #

    시장과 독자가 작에게 관대한 네이버니까 시즌 1개 분량으로 연재가 됐지, 다음에서 연재했으면 4회 분량으로 완결 표시조차 뜨지 못한 채 쫑 났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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