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즈 역곡 프리토크


아주 어렸을 때 역곡에 몇 년 살긴 했는데 그때는 기억도 안 나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가 역곡으로 다시 돌아온 게 약 1990년.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약 25년 동안 역곡에 살아서 이제는 역곡 토박이가 됐다고 해도 무방한데.. 짧으면 3개월. 길면 4개월 내로 역곡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갈 예정이라 뭔가 감회가 새롭다.

그래서, 과연 내가 25년 동안 산 역곡에는 뭔가 구경할 만한 곳, 가볼만 한 곳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건 없다.

어쨌든 역곡을 떠나면 굳이 다시 올 거 같지는 않아서 어거지로라도 기억할 만한 것을 남기려 노력해 봤다.


역곡역 고양이 역장. 이거 지금까지 20년 넘게 여기 살면서 전혀 몰랐다. 뭔가 TV에도 나온 적이 있다는데.. 실제로 고양이 역장을 보려면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시간에 딱 맞춰 가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사는 곳은 북부역 방향으로 원미구 역곡동인데 전철역을 경계로 삼아 남쪽으로 넘어가면, 원미구 역곡이 아닌 소사구 괴안동이 된다. (뭐, 그래도 그 괴안동이 지도상으로는 역곡 3동에 속해 있으니 역곡이라고 봐도 무방하려나)


역곡 남부역 식당 골목길에 유일하게 관광지라고 할 만한 게 생겼다. 내 기억으로는 이게 생긴 지 1년이 채 안 된 걸로 알고 있고, 작년에 공사하는 걸 본 기억이 난다.

이두호 선생의 만화 '임꺾정'을 가지고 '임꺾정로'라는 길을 만든 것인데, 일본 돗토리현에서 미즈키 시게루 선생의 게게게의 키타로를 가지고 키타로 로드를 만든 것과 같다. 근데 임꺾정 원작과 부천시 역곡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공사 완료 후 이두호 선생 사인회도 열렸는데 이 역곡이 워낙 변방의 북소리가 울릴 법한 외진 곳에 있다보니 사람들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임꺾정 브론즈상이 인상적인데 크기가 등신대라서 진짜 기골이 장대하게 느껴진다.


노상용 작가의 작품이라고 써 있는데 만화가 이름이 떠오르지만, 아마도 그 분이 아니라 조각상 만든 분으로 이름만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임꺾정로 안쪽으로 좌우에 식당이 늘어서 있고, 몇몇 식당 간판에는 임꺾정 만화의 한 장면과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근데 사실 그게 전부다. 가게 전체가 다 임꺾정 그림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일부 가게만 조그맣게 들어간 관계로 관광지라고 보긴 좀 그렇다.

결국 볼거리는 임꺾정로 입구를 지키고 서 있는 임꺾정 브론즈상 하나 정도다. 임꺾정 원작 만화 팬이라면 한번쯤 와서 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어 가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 사진 하나 찍으라고 역곡까지 오란 건 아니다)


임꺾정로 안쪽으로 쭉 가다 보면 인형뽑기 기계도 있다.


인형뽑기 기계야 어디에든 다 있지만 역곡은 역시나 변방이라서 그런지, 뽑기 상품도 애매한 구석이 있다.


무려 원피스 피규어가 들어 있는데 미니 피규어는 둘째치고, 큰 사이즈의 피규어는 '징베'랑 '타시기' 밖에 없다. 거기다 박스풀셋도 아니고 속표지나 완충제 하나 없이 그냥 속 비치는 비닐 박스에 아무렇게나 들어가 있다.

원피스의 유행은 전혀 따라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다른 부분에서 시대의 유행을 따라가려고 한 건지 러버덕 미니 인형도 있다. (사실 그거보다는 패딩 교환권이나 오만원권 현금 교환이 더 눈에 띄지만)

아참, 그리고 저 인형 중에 뽀로로 인형 보고 생각난 건데..

임꺾정로를 지나면 역곡 3동 시장으로 측면돌파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위쪽으로 쭉 올라가면 뽀로로가 환영해준다.


어? 잠깐. 눈높이가 낮잖아. 뽀로로 다리 어디갔어, 다리.


...아. 옆에서 보니 뽀로로 다리 있다.

처음에 이걸 보고 '뽀로로 스핑크스'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굉장히 슬픈 사연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아이들의 대통령. 뽀통령이라고 불린 것도 한 때지. 꼬마 버스 타요가 아이들의 우상이 되면서 뽀로로는 설 자리를 잃었다.

실직자가 된 뽀로로는 아무도 찾지 않은 변방의 작은 시장 구석탱이에 처박힌 채로 엎드려 누운 채 언제 올지 기약이 없는 아이들을 기다린다.

'애들아. 나도 너희를 태울 수 있어. 타요 버스만 너희를 태울 수 있는 건 아니야.'

이런 절규가 귓가에 환청처럼 들려온다.


뽀로로 옆에 또 뭔가 보이는데 저건 누구지.


...

80년대 세대로서 세월의 풍파에 찌든 꼬마자동차 붕붕의 어른 버전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녹색과 악어 같은 생김새를 보면 뽀로로의 친구 크롱으로 추정된다.

근데 뽀로로는 자세가 좀 민망해서 그렇지 팔 다리 다 멀쩡히 붙어 있는데 크롱은 머리 밖에 안 남은 거라 어떻게 보면 그로테스크하다.


아무튼 뽀롱과 크롱 이용요금은 500원. 단 돈 500원에 모시는 서비스지만, 이걸 이용하는 아이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역곡 3동 시장의 꼭대기. 그러니까 가장 안쪽. 가파란 경사의 끝에 위치해 있으니 이거 하나 타려고 그 거리를 올라오는 아이가 있을리가...


다시 역곡 북부역으로 건너와 역곡 1동 시장을 지나 역곡 중학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정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폐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역곡이 본래 아파트가 새로 지어지기 전에 기존의 민가를 죄다 철거해서 곳곳에 폐허만 남아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따로 없었는데, 다른 곳은 그래도 다 건물을 새로 지어 빈 자리를 채웠는데 유독 여기만은 폐건물이 흉물스러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낡고 오래된 건물이라 창문에 새겨진 디즈니 캐릭터 그림이 피부가 갈라지고 코와 입이 없어지는가 하면 피부가 벗겨져 한 밤 중에 여길 지나가다 보면 꽤 오싹하다.

계속 이렇게 냅둘바에 차라리 심령 스팟으로 활용하는 게 어떨까. 왜 그 한국 3대 흉가니 뭐니 하는 것처럼 말이다.

영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걱정할 게 없다.

이래뵈도 역곡은 성역이니까. 영어로 생츄어리. 디아블로도 범접하지 못할 성역이다.

건물 하나, 블럭 하나 하나 사이에 교회가 있어서 그런 것으로 언젠가 한 번 기사로도 나온 적 있다. 반경 104 미터 이내에 교회가 하나씩 있어서 상공에서 보면 빨간 십자가가 가득한 게 보인다고.

그래서 집에 있으면 봄여름가을겨울 가리지 않고 교회에서 찾아와 전도를 펼치고, 역전 앞, 한 밤 중의 시장 입구 앞에도 교회 사람들이 진을 치고서 전도를 하며, 역곡역 앞에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피켓을 목에 건 장년 아저씨가 역곡역 고정 NPC처럼 365일 상주하고 계시니 그 어떤 악마들이 역곡을 넘볼 수 있으랴.


전철역사를 지나 맞은 편 길을 건너고 역곡 시장 입구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최근 수입 과자 전문점이 서로 마주 본 자리에 2군데나 동시에 생겼는데.. 그중 한 곳에 엄청나게 큰 개가 가게 앞을 지키고 서 있다. 견종이 검색해 보니 아프간하운드라고 하는데 첫 인상이 강철의 연금술사였다. (금방이라도 '에드워드 오빠, 놀자~'라고 할 것 같았다)


역곡 2동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역곡 2동 파출소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게 보인다. 근처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새로 조성된 공원인데 명색이 공원 이름이 새겨진 바위까지 있다. 일단 여기까지 보면 평범한데..


무려 한때 인기 애니메이션의 조형물 구역도 있다. 명색이 부천은 만화의 도시라서 그렇다.


하지만 뭔가 이게 전시용인지, 놀이용인지 구분이 안 가는 낮은 퀄리티를 자랑해서 아무도 이용을 안 하고..


심지어 저 이글루 안에는 깨진 유리와 담배 꽁초가 널려 있다.


이글루 옆을 지키는 꼴통(빼꼼에 나오는 개 이름)이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래도 빼꼼의 머그잔 여행. 즉 빼꼼 극장판 컨셉 구역이라 꼴통 이외에 다른 캐릭터가 어디 없으랴. 라는 생각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극장판 오리지날 캐릭터인 인간 꼬마 베베의 조형물이 있다.

어. 잠깐.



...이 무슨,

이거 처음 봤을 때 좀 놀랐다. 무슨 수풀 속에 시체가 버려진 것 마냥 아무렇게나 눕혀놔서 그렇다. 본래 컨셉이 이런 건지, 아니면 관리를 안 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이거 한 밤 중에 공원 지나가다가 보면 가슴이 철렁거린다.


주인공은 빼꼼도 물론 조형물이 있다.

빼꼼 조형물도 난간 안쪽 수풀 속에 있는 거 보면 베베도 그냥 저렇게 두는 게 컨셉인 모양이다.

애교를 부리는 빼꼼이 유난히 처량 맞다. 뽀로로도 그렇고, 빼꼼도 그렇고. 역곡은 한때 한국 애니메이션 인기 캐릭터의 무덤 같은 곳이구나..

....

아 근데 진짜 25년 동안 역곡 살면서 사진으로 찍고 기억에 남길 만한 게 이런 것 밖에 없다니 비참하다 ㅠㅠ



덧글

  • yazyk 2015/01/06 01:15 # 답글

    뽀로로의 자세가 음탕해
  • 잠뿌리 2015/01/06 17:11 #

    뽀로로가 저렇게까지 타락한 거지요.
  • Aprk-Zero 2015/01/06 05:02 # 답글

    혹시 이사 가시면 서울쪽으로 이사가실건가요....
  • 잠뿌리 2015/01/06 17:11 #

    인천 쪽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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