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패왕 (西楚覇王.1994) 홍콩 영화




1994년에 장예모 제작, 선기연 감독이 만든 초한지 영화.

내용은 진시황 사후 항우가 군대를 일으켜 진나라를 멸하고 초나라를 세우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워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다.

총 2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의 내용은 진시황 사후 항우가 진나라를 멸하고 아방궁을 불태우는 부분까지 나오고, 2부는 항우가 초나라의 왕이 되지만 유방이 군세를 일으켜 전쟁을 벌여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전체 러닝 타임이 198분으로 3시간이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상당히 긴 축에 속하지만, 항우 생전과 사후까지를 기준으로 한 처음과 끝을 모두 담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스토리를 빠르게 스킵하며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조고가 호해를 죽이고, 자영이 조고를 죽인 뒤 유방에게 항복해 진나라가 완전 멸망하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2분 밖에 안 된다.

전쟁씬 같은 경우도 동원된 엑스트라의 수를 보면 당시 기준으로 볼 때 규모가 제법 크지만 전쟁씬 자체는 몇 분 안가서 끝나 버린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TV 드라마 총집편을 보는 느낌마저 준다.

좋게 보면 자잘한 부분을 쳐내고 줄인 걸 줄여서 슬림하고 스피디하게 진행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 처음부터 이야기 전체를 담을 게 아니라 핵심적인 부분만 담는 게 더 낫지 않았나 싶다.

서초패왕이란 제목답게 항우가 주인공으로 나오고 유방은 악역 포지션에 가깝다.

항우는 야망이나 포부가 큰 천하의 패자가 아니라 가족, 친구, 연인을 끔찍이 아끼며 그러한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감정을 앞서 수많은 실책을 범하는 순정 마초로 나오는데 비해서 유방은 기회주의자에 소인배 기질을 타고난 악당으로 나온다.

특히 항우는 2부의 클라이막스로 넘어간 시점부터 캐릭터 밀도가 대단히 높이 올라가서 원작의 비장미를 잘 살렸다. 특히 영화가 거의 끝날 때쯤에 나오는 항우의 무쌍난무와 그 최후가 인상적이다.

원작에서 항우가 자해한 뒤 장수들이 공적을 다투며 그 몸을 다섯 갈래로 찢어 하나씩 취해 다섯 열후로 봉해지는데, 본작에서는 여치가 항우의 시신을 부여잡고 오열하고 유방이 정중히 장례를 치러주라 명해서 역사 왜곡이라고 까였다.

사실 본작의 진 주인공은 유방의 아내인 여치다. 유방에게 소외 받으면서도 유방의 천하를 위해 온갖 흉계를 꾸며 초나라를 뒤집는 악녀로 나오는 한편, 항우를 짝사랑해서 우희와 삼각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희대의 악녀이면서 동시에 애정에 굶주린 여자로 팜므파탈의 절정을 찍는다.

항우 몰락의 단초를 제공하는데 민심 이탈 유도, 항우 지지 기반 제거, 영포 투항, 화살 맞은 유방 허세, 가짜 유방 거짓 항복, 범증 추방, 사면초가 계책 등등 본래 원작에서 장량, 진평, 소하 등이 할 일을 혼자 다 해먹기 때문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 수준으로 나와서 상대적으로 다른 캐릭터들의 존재감이 없어진다.

정말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악녀로 묘사되고, 또 그 배역을 맡은 공리 역시 호연을 펼쳐서 본작을 보고 여치 하나만 기억에 남게 될 정도라 양날의 검이 됐다.

작중에 범증이 쫓겨나기 직전에 여치를 보고 황후가 될 것이라 예언하고, 라스트씬에서 여치가 항우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며 나레이션으로 여후가 왕이 되어 토사구팽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이쯤되면 영화 제목이 서초패왕이 아니라 왕후여치다.

본래 히로인이 되었어야 할 우미인은 본명이 우묘과로 나오고 관지림이 배역을 맡았는데 여치에 밀려 서브 히로인 포지션으로 나오며, 원작과 달리 여기서는 여치와 의자매를 맺고 그녀에게 철저히 이용당하면서 그것도 모른 채 그녀를 비호해 항우 몰락에 가속도를 붙이는 민폐 히로인으로 나온다.

아예 작중에 범증이 쫓겨나기 직전 우미인을 보고 ‘너로 인해 항우가 죽을 것이라’라고 단언하는 씬까지 나올 정도로 역대 초한지 중에 가장 민폐도가 높게 묘사된다.

작중 오리지날 캐릭터로 우미인의 오빠인 우자기가 나오는데 실수로 초회왕 의제를 죽였다가 자해하는 역으로 나와서 유방 반란의 빌미를 제공한다. 본래 원작에서는 항우가 죽인 것으로 되어있는데 본작에서는 그게 우자기 일로 바뀌고 그것도 실수로 그런 것이며, 그런 실수를 저질렀는데도 참형에 처하지 않고 시신도 수습해준 항우의 의리를 부각시키게 했다.

한나라 진영은 장량, 소하, 영포, 한신은 엑스트라처럼 나오고 팽월은 아예 나오지도 않으며 번쾌만이 유일하게 1부에서만 아주 조금 비중 있는 단역으로 나온다.

장량이 창해력사를 이용한 진시황 암살 시도로 영화가 시작된다는 걸 생각하면 작중에서 하는 일이 ‘안 됩니다. 물러납시다. 상황이 어렵습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만 하다가 여치가 그걸 해결한 책략을 내놓게 하는 셔틀 역할 밖에 못하고 있으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영포와 한신은 묘하게 엮이는데, 영포가 비겁한 책략을 디스하고 항우의 영웅적인 기질을 인정할 때마다 옆에서 한신이 깐죽거리는 걸로 나온다.

초나라 진영에서는 그나마 범증이 유방, 여치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범증 배역을 맡은 건 유순인데 특히 항우에게 추방당하는 씬에서 보여준 연기가 일품이다.

서금강이 배역을 맡은 종리매는 원작과 다르게 장한군과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한쪽 눈, 팔, 다리를 잃은 처참한 모습이 되어 항우로 하여금 신안대학살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장한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숙부인 항연의 사망, 우희의 실종에 이어 종리매까지 불구가 된 상황에서 술 취한 범증이 천하를 얻게 됐다고 껄껄 웃으며 좋아하자 멘탈 붕괴가 일어나 대학살을 벌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 외 나머지 인물은 계포, 항장 정도만 나오는데 둘 다 비중이 엄청 낮고 본래는 종리매도 그렇고 항우 사후 시점에도 일단은 살아남은 장수들이 그 전에 떼몰살 당하는 전개로 나가며 오히려 뜬금없이 오추마만 살아남는다. (그래도 아예 이름조차 언급 안 된 용저에 비해선 나은 대우일까)

결론은 평작. 러닝 타임이 긴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 초광속 스킵을 한 게 악수로 작용해 배경 설정에 비해서 이야기의 스케일이 작아 보이고, 주요 인물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을 전부 쩌리로 만들어 캐릭터 운용도 못했지만 여치가 진 주인공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캐릭터의 밀도가 높아서 몰입도가 높은 작품이다.

여담이지만 본편의 전투씬에서 자주 나오는 음악 중에서 존 부어맨 감독의 1981년작 엑스칼리버에 나온 노래로 합창발레 카르미나 부라나의 서곡 제 1곡 운명의 여신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근데 역시 원곡의 퀼리티를 따라가지는 못하고 있다)



덧글

  • 블랙하트 2014/06/24 22:52 # 답글

    포스터가 어디서 많이 본거 같다 싶었는데 지관에서 나온 삼국지 대전격투 게임 '풍운천하'(風雲天下) 의 국내판 패키지 그림이 저 포스터를 트레이싱 한거였네요.
  • 잠뿌리 2014/06/29 18:38 # 답글

    블랙하트/ 그 당시 지관에서 나온 게임들이 포스터 트레이싱이 유난히 많은 것 같습니다.
  • 먹통XKim 2019/02/10 23:17 # 답글

    1996년 MBC에서 명절특선으로 더빙 방영했죠

  • 먹통XKim 2019/02/10 23:17 # 답글

    장이모가 감독한 것으로 기억했는데 아니었군요
  • 잠뿌리 2019/02/11 17:23 #

    장이모는 본작에서 제작을 맡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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